장마가 끝나고 제대로 된 더위가 시작되니 시트러스와 아쿠아틱 계열을 자연스레 찾게 됩니다. 며칠 전 장롱 깊숙이 넣어둔 버버리 썸머 포 맨 2013을 우연히 꺼내서 뿌려봤는데, 이게 10년이 넘은 향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괜찮더군요. 보관을 잘 해둔 덕분인지 탑노트의 자극적인 날카로움만 살짝 죽고 나머지는 거의 초기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오늘은 이 향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이 향수는 2013년 여름 한정으로 출시된 버버리의 썸머 시리즈 중 하나로, 계열은 우디 아쿠아틱입니다. 출시 당시만 해도 섬머 한정판이 지금처럼 흔한 마케팅 수단이 아니었기 때문에, 브랜드에서 나름 공을 들여 만든 티가 났습니다. 실제로 지금 다시 들여다봐도 구성이 꽤 알차거든요.
탑노트는 주니퍼 베리와 만다린 오렌지, 민트가 시원하게 터집니다. 주니퍼 베리의 드라이하고 약간 쌉싸름한 침엽수 뉘앙스가 만다린의 달콤한 시트러스와 만나면서, 흔히 생각하는 싸구려 남성향수의 오렌지 개스킷과는 느낌이 다릅니다. 민트는 강하지 않지만 청량감을 보태는 역할을 하고요. 개인적으로 이 탑노트가 이 향수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주니퍼 베리라는 선택 자체가 예사롭지 않았던 거죠.
미들로 넘어가면 페티그레인이 올라오면서 쌉싸름한 녹음이 살짝 깔리고, 유자의 시트러스가 남아서 전체적으로 밝은 톤을 유지합니다. 이 향이 일반 남성 아쿠아틱과 결이 다른 지점이 바로 이 미들 단계입니다. 흔히 아쿠아틱 계열은 미들에서 칼론이나 디하이드로미르세놀 같은 합성 분자들로만 떡칠되어 단조로운 물비린내로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향은 페티그레인의 허베이션한 드라이함과 유자의 새콤함이 받쳐주면서 꽤 오래 입체감을 가져갑니다. 물론 오래 지속된다는 건 아닙니다. 한여름 오프레시 향에 지속력을 기대하는 거 자체가 무리니까요.
베이스는 드리프트우드가 중심입니다. 이 노트가 이 향수의 이름에 '썸머'가 붙은 이유를 설명해주는 대목인데, 일반 우디보다 훨씬 가볍고 바닷가에서 오래 말린 유목 같은 공기감을 줍니다. 묵직하게 깔리는 게 아니라 은은하게 스며드는 느낌이라 여름에 부담 없습니다. 깊이가 있거나 복잡한 향은 절대 아니지만, 가벼운 우디 베이스 덕에 마치는 느낌이 헐겁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어코드는 아로마틱, 시트러스, 프레시 스파이시입니다. 여기서 '스파이시'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후추나 정향 같은 따뜻한 스파이스가 아니라, 주니퍼 베리와 민트가 주는 서늘하고 약간 자극적인 스파이시함을 말하는 거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여름 더위에 오히려 잘 어울리는 방향성이죠.
단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지속력은 바디에 3시간, 옷에 4-5시간 정도로 길지 않고, 확산력도 초반 이후로는 굉장히 얌전합니다. 그리고 이게 단종된 지 오래라서 지금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간혹 중고 장터나 해외 이베이에서 보이긴 하는데, 10년 넘은 재고다 보니 변질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저처럼 운 좋게 양호한 상태를 만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아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 향이 풀배를 들일 만큼 독보적인 완성도를 가졌는가 하면, 그건 아닙니다. 여름 한정판으로 당시 가격 대비 괜찮았지, 지금 프리미엄 주고 구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수집가 입장에서 이 향을 아직 버리지 않고 간직하는 이유는, 2010년대 초중반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보여주던 한정판에 대한 태도가 그리워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한정판이라고 내놓으면서도 그냥 오리지널에서 노트 한두 개 바꾼 플랭커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2013년의 썸머 포 맨은, 비록 지금은 잊혔지만 분명 당시에는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낸, 자기 자리를 아는 향수였다고 생각합니다.
더운 날씨에 향수 뿌리는 게 오히려 부담스러우신 분들이라면 이런 올드스쿨 우디 아쿠아틱이 오히려 정답일 수 있습니다. 시중에 깔린 합성 아쿠아틱의 물비린내가 싫은 분, 대신 드라이하고 쌉싸름한 여름 향을 찾는 분께는 충분히 한 번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물론 상태 좋은 걸 구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말입니다.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