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 아니게 장마가 끝나자마자 폭염이 찾아오면서, 장식장 앞에 서 있는 시간보다 냉장고 앞에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요즘입니다. 이런 계절이면 아무래도 손이 가는 병은 정해져 있죠. 집에 모셔둔 크리드 실버마운틴워터나 로하스 런던의 올리브블라썸 같은 시트러스 계열을 꺼내는 빈도가 확 올라가는데, 문득 서랍 깊숙이 넣어둔 카들라즈 시야카 스노우가 눈에 띄었습니다. 출시된 지 얼마 안 된 2025년 신작인데, 받아놓고 테스트한 이후로 제대로 착향을 안 했더군요. 그래서 며칠 전부터 본격적으로 꺼내서 써보고 있습니다.
일단 구성부터 말씀드리면, 탑은 베르가못과 만다린으로 시작합니다. 흔한 시트러스 오프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에 네롤리가 상당히 비중 있게 들어가 있습니다. 보통 여름용 프레시 계열에서 네롤리를 쓰면 합성스러운 섬유유연제 느낌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시야카 스노우는 그 부분을 의외로 얌전하게 처리했어요. 확실히 네롤리 특유의 비눗기 있는 달큰함은 있는데, 카다멈과 넛맥이 동시에 올라오면서 시트러스를 스파이시한 방향으로 살짝 틀어줍니다. 그래서 오프닝이 단순히 산뜻한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피부에 얹었을 때 미세하게 톡 쏘는 듯한 자극이 있어요. 이게 핑크페퍼와 맞물리면서 초반 10분 정도는 꽤 재미있는 긴장감을 줍니다.
제가 이 향을 눈여겨본 이유도 사실 거기에 있습니다. 시트러스 아로마틱 계열은 여름철 대중적인 선택지가 워낙 많아서, 하나를 고르려면 결국 "이 향만의 변별점"이 있어야 하거든요. 시야카 스노우는 베르가못과 만다린의 상큼함을 메인으로 깔되, 네롤리와 향신료 조합으로 미드 노트에서 살짝 드라이한 질감을 만들어냅니다. 흔히 시트러스 향수들이 톱노트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고 30분 지나면 싱겁게 가라앉는 것과는 결이 다릅니다. 물론 지속력 자체가 비약적으로 긴 건 아닙니다. 시트러스 계열이 원래 구조적으로 오래 가기 어려운 건 다 아는 사실이고, 이 제품도 예외는 아니에요. 하지만 최소한 톱노트가 급격하게 꺼지지 않고, 베이스로 갈수록 네롤리와 핑크페퍼가 남은 시트러스 빈자리를 채우는 방식이라 체감 지속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제 팔뚝 기준으로 대략 4시간 정도는 은은하게 잔향이 남더군요.
단점도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드라이다운에서 카다멈이 빠지고 네롤리만 남을 때, 이 향을 싫어하는 분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누향 같다"는 느낌이 분명히 있습니다. 제 취향에는 그 비누향이 깔끔해서 나쁘지 않았는데, 그간 모아온 시트러스 계열 향수들과 비교하면 다소 평범하게 마무리되는 감이 없지 않아요. 루이비통 애프터눈스윔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앰버 우디로 무게를 잡아주는 구조도 아니고, 실버마운틴워터처럼 차가운 금속성으로 끝까지 버티는 개성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깔끔하게 웨어러블한, 무난한 드라이다운이에요. 이 부분이 호불호의 가장 큰 분기점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워낙 네롤리를 좋아하는 편이라 괜찮지만, 네롤리에 예민하신 분들은 주의가 필요하겠네요.
그래도 이 향이 2025년에 나왔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최근 수년간 니치, 두바이, 인디 하우스 할 것 없이 시트러스 계열 신작들은 오드뚜왈렛 수준의 가벼운 구성에 앰브록산만 잔뜩 때려넣는 경우가 허다했거든요. 시야카 스노우는 그런 유행과 일정 부분 거리를 둔 느낌입니다. 네롤리와 향신료로 미드를 단단하게 잡으려고 한 시도 자체가 반갑고, 카들라즈 특유의 가격대를 생각하면 풀배럴을 구매해도 부담이 적다는 점은 분명한 강점입니다. 디캔으로 찔끔 경험하기보다는 차라리 풀배럴을 사서 여름 내내 편하게 뿌리는 쪽을 추천하고 싶네요. 저처럼 변호사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 맞으며 일하는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이 정도 밸런스가 오히려 실용적이었습니다. 요즘 같은 폭염에 니치 향수 꺼내기 아깝다 생각되실 때, 데일리로 부담 없이 쓰기 좋은 선택지 중 하나로 추천드립니다.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