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좀 올드한 녀석 하나 꺼내봅니다. 에르메스 켈리 칼레쉬 오 드 퍼퓸, 2009년작이죠. 이거 사실 여성향으로 분류되는데, 남성분들이 쓰셔도 이상할 거 하나 없는 구성이라 일부러 가져왔어요. 저도 가끔 손이 갑니다.
이 향수 처음 딱 뿌리면 오는 느낌요. 장미인데 장미꽃다발이 아니에요. 백화점에서 파는 생화 장미, 물기 촉촉한 그런 관능적인 장미가 아니라 완전히 건조된, 마치 장미잎을 책갈피에 오래 눌러둔 것 같은 파우더리한 느낌이 먼저 코를 찔러요. 여기에 정말 에르메스다운 고급진 가죽 향이 깔리는데, 이게 새 차 가죽 시트 냄새 같은 게 아니고, 수십 년 써서 길들여진 말 안장 같은 버터리하고 살짝 동물적인 스킨 스멜에 가깝습니다.
팩트는, 이 향수는 절대 마냥 예쁘고 사랑스러운 향이 아니에요. 솔직히 말해서 처음 이거 시향하고 '향이 팍 늙어 보여요'라고 느낀 분들 꽤 있을 거로 압니다. 제 주변에서도 '할머니 화장대 냄새난다'고 바로 손절각 나온 지인 있었어요. 맞아요. 틀린 말 아닙니다. 이 파우더리함과 가죽의 조화가 성숙미를 넘어서서 20대 초중반, 혹은 가벼운 느낌 좋아하는 분들한텐 최악의 선택이 될 수 있어요.
근데 이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미친 듯이 빠져드는 것도 결론입니다. 에르메스 특유의 아이코닉한 가죽 베이스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떼르 데르메스 같은 데서 가지 말고 차라리 이걸 손에 넣으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 로즈가 달콤하거나 붉게 터지는 느낌 없이, 가죽과 파우더에 절제되게 묻어나는 방식이라 세상에 흔한 장미 향수랑은 급이 다르다는 게 느껴집니다. 지속력이랑 확산력도 EDP 답게 꽤 좋아요. 무턱대고 뿌리면 진짜 하루 종일 나만의 결계를 치는 수가 있으니 한 번만 눌러도 충분합니다.
이 병 특유의 자물쇠 디자인도 참 잘 뽑았다고 생각하는데, 이거에 꽂혀서 백화점 영수증 없이 중고나라 같은 데서 긁어오는 건 반대입니다. 이런 고가 니치 스러운 디자이너 향수일수록 짝퉁이 기승이라, 십중팔구 리필짝퉁이거나 통을 따서 알콜 섞은 놈일 가능성이 높아요. 의심스러우면 다른 할인 경로 알아보는 게 맞고, 못 믿겠으면 그냥 정식 수입처에서 사세요. 가품 한 번 당해보면 그 향수 자체가 PTSD 유발 향이 됩니다.
가죽 향에 진심이거나, 마른 장미와 파우더의 조합을 우아하게 소화할 수 있는 베테랑이면 충분히 도전해 볼만 합니다. 아닌 분들은 시향 없이 지르지 마시고, 꼭 시향 먼저 해보길 권해요. 생각보다 호불호 칼 같이 갈리는 향수입니다.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