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되면 이상하게 시중에 없는 향, 80~90년대 묵은 향수들 뒤적거리게 되더라고요. 요즘 나오는 애들은 다들 첫인상에 목숨 걸고 달고 시원한 걸로 승부 보는데, 그런 것만 맡다 보면 코가 피곤해져서. 그래서 오늘은 진짜 올드스쿨, 에르메스 벨 아미(1986년) 얘기 좀 해볼까 합니다.
우선 노트만 보면 베르가못, 카다멈, 레몬, 만다린 오렌지에 세이지, 바질까지. 뭔가 상큼 허브티 마실 것 같은 구성이죠. 근데 이거 절대 청량한 오프닝 상상하고 들이대면 안 됩니다. 팩트는 저 상큼한 노트들이 30초도 안 돼서 가죽이랑 묵직한 우디 베이스한테 완전히 밟힌다는 거예요.
첫 분사하면 확 올라오는 건 레몬껍질 쓴맛이랑 만다린의 살짝 어두운 시트러스인데, 이게 금방 사라지면서 바질이랑 세이지 같은 아로마틱 허브가 올라옵니다. 문제는 이 허브 향이 싱그러운 풀내음이 아니라 완전히 말린 허브, 그것도 약재상 한켠에서 나는 묵직하고 쌉쌀한 냄새에 가깝다는 거요. 여기서 호불호 1차로 갈려요. 이 허브 향이 옛날 한약방 떠올리게 한다고 못 버티는 분들 계시더라고요.
중반 넘어가면 본격적으로 올드머니 가죽 냄새가 올라오는데, 이게 진짜 골동품 가죽 가방에서 나는 기름진 가죽 냄새 그 자체예요. 새 가죽 냄새 같은 싱그러운 느낌은 1도 없고요. 여기다가 오크모스 특유의 축축하고 스모키한 느낌까지 깔려서 착 감기는 육향(animalic) 비스무리한 느낌까지 살짝 올라옵니다. 요즘 향수에선 도저히 범접 못 할 그런 야성미가 있죠. 30대 이하 분들이 이거 뿌리고 나가면 친구들이 '뭐 탔냐'고 물어볼 확률이 높아요. 걔네가 나쁜 게 아니고 이 향이 튀는 겁니다.
예전에 당근에서 벨 아미 미개봉 싸게 올라왔길래 업어왔는데, 테스터 맡아보지도 않고 블라인드 질렀던 초보 시절이 생각나네요. 첫 뿜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어요. 분명 레몬, 만다린 써 있는데 왜 이렇게 칙칙하지? 싶고. 근데 좀 지나니까 이게 가죽 자켓 입고 바버리 머플러 두르고 나가는 늦가을에 정말 찰떡이라는 걸 깨달았죠. 이 향을 소화하려면 옷빨도 좀 받쳐줘야 하고, 어느 정도 나이도 받쳐줘야 한다고 봅니다. 20대 초반이 이거 뿌리면 향수에 쫄린 느낌밖에 안 남아요.
신기한 건 이게 1986년에 나왔다는 거죠. 이 시절 에르메스가 얼마나 과감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에요. 지금 같으면 리스크 관리한다고 첫인상에 바질, 레몬 강조하고 가죽 노트는 은은하게 깔았을 텐데, 그런 꼼수 없이 그냥 밀어붙였어야. 그래서인지 지금 벨 아미 리뉴얼 버전들은 초반을 좀 먹히게 바꿔놨더라고요. 원조의 야생미를 좀 죽이고. 그래서 구형 배치 구하는 분들도 은근히 있지만, 당근에 올라오는 벨 아미 구형이라는 것들 태반은 산화됬거나 보관 상태 개판이라 변질된 경우가 많아서 주의해야 합니다. 뚜껑 열면 약재상 비린내 나면 그건 산화된 거예요.
결론은 올드 스파이시 가죽 우디의 교과서 같은 향인데, 현대적 감성의 쉬운 향만 맡아온 사람한텐 백이면 아흔아홉은 충격입니다. 단점도 확실하게 써놨으니 감안하시고, 진득한 가죽과 묵직한 우디 시프레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소분이라도 꼭 맡아보길 권해요. 백화점 시향지로는 절대 판단 못 할 향이니까, 반드시 손등에 뿌려서 중반 이후의 가죽과 이끼의 조화를 확인하는 게 정석입니다.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