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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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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노 Donna Born In Roma를 두고, 젊은 오리엔탈의 방향성을 생각해 봅니다

이 글은 Donna Born In Roma(Donna Born In Roma) 관련 후기와 커뮤니티 의견을 다룹니다.

올드스쿨겔랑

2026-08-18 00:37:18.317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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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 나온 발렌티노 Donna Born In Roma를 최근에야 제대로 입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에는 이 향을 단순한 젊은 층 타겟의 상업적 플로럴 정도로만 짐작했는데, 막상 피부에 얹고 시간을 들여 관찰해 보니 의외로 할 말이 제법 있는 구성이더군요. 오늘은 이 향을 두고 제 나름의 소회를 적어봅니다.

오프닝은 베르가못과 블랙커런트, 핑크페퍼가 함께 터지는데, 여기서 블랙커런트의 역할이 꽤 묘합니다. 보통 베르가못이나 핑크페퍼가 주는 상쾌한 시트러스 스파클링을 기대하게 마련인데, 이 향은 첫 숨부터 은근한 프루티의 당도가 섞여서 완전히 건조하게 열리지 않아요. 블랙커런트 특유의 살짝 어둡고 달콤한 베리 향이 핑크페퍼의 톡 쏘는 자극과 만나면서 마치 샴페인에 크렘 드 카시스를 살짝 떨어뜨린 듯한, 축축하고 반짝이는 인상을 줍니다. 저처럼 전통적인 오리엔탈, 예를 들어 겔랑의 샤리마르나 샤넬 코코 같은 묵직한 오프닝에 익숙한 코에는 다소 경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만, 그 경쾌함이 단순하지 않고 꽤 의도적으로 꾸며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반으로 넘어가면 이 향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자스민이 세 겹으로 등장합니다. 노트에 표기된 자스민, 자스민 삼박, 그리고 재스민 티라는 표기가 다소 특이한데, 제가 이해하기로는 일반적인 자스민 앱솔루트의 풍만한 백화향, 삼박(sambac) 특유의 인돌릭하면서도 과실 같은 그늘진 단면, 그리고 차(tea) 어코드가 주는 약간의 수렴성과 청량함을 층층이 쌓아올린 구조로 보입니다. 이 부분이 사실 이 향의 명암을 가르는 지점이지요.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플로럴 하트에 이런 미세한 변주를 준 것은 기술적으로 꽤 흥미롭습니다만, 정통 오리엔탈 플로럴을 기대하는 입장에서는 다소 조급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겔랑의 나헤마 같은 향이 장미를 다룰 때 보여주는 그 느리고 깊은 전개와 비교하면, 도나 본 인 로마의 자스민은 훨씬 짧은 호흡으로 자기를 드러내고 곧바로 베이스로 손을 넘깁니다. 깊이 음미하기 전에 다음 단계가 와 버리는 셈이지요.

베이스는 우디와 바닐라, 그리고 이 향의 주요 어코드로 표기된 프루티가 자리를 잡습니다. 여기서 바닐라는 고전적인 오리엔탈에서처럼 짙고 동물적인 앰버와 결합하여 깊게 가라앉는 방식이 아니라, 꽤 현대적인 클린 바닐라에 가깝습니다. 묵직한 레진이나 벤조인의 그늘 없이, 우디도 역시 묵직한 시더나 샌달우드라기보다는 합성 우디 베이스 특유의 깔끔하고 약간 바삭한 질감에 바닐라의 부드러운 당도가 코팅된 느낌입니다. 이 지점에서 프루티 어코드가 잔향까지 계속 남아서 바닐라와 우디 사이를 메우는 역할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호불호가 갈릴 만하다고 봅니다. 한여름 고온에서는 이 프루티와 바닐라가 체온에 데워지면서 의외로 무거워질 수 있어요. 제가 시험한 날이 섭씨 30도를 넘는 늦봄 한낮이었는데, 첫 한두 시간은 괜찮았으나 세 시간째부터는 바닐라와 프루티 잔향이 땀과 뒤섞여 다소 답답하게 변하더군요. 반대로 기온이 20도 초반으로 떨어진 초여름 저녁에는 자스민과 우디의 균형이 훨씬 우아하게 느껴졌습니다. 즉 이 향은 표면상으로는 사계절용 오리엔탈 플로럴을 표방하지만, 실착 경험으로는 선선한 날씨에 훨씬 제 컨디션을 발휘하는 구조입니다.

도나 본 인 로마를 두고 흔히들 현대적이고 대중적인 오리엔탈 플로럴의 성공 사례라고 평합니다만, 저는 그보다는 '과도기적'인 향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2010년대 후반의 취향을 반영하여 오리엔탈의 무게를 대폭 덜어내고, 대신 프루티와 클린 우디로 속도를 높인 구성은 분명히 많은 젊은 착향자들에게 어필할 만한 지점이 있습니다. 다만 그 결과로 오리엔탈 본연의 관능적이고 느린 깊이, 이를테면 피부 위에서 몇 시간에 걸쳐 서서히 변모하며 풀어내는 그 비밀이 상당 부분 희생되었지요. 향수란 결국 시간과의 싸움인데, 이 향은 그 시간을 단축해서라도 첫인상의 반짝임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게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대가 그러하고, 젊은 세대가 향을 대하는 방식이 그러하니 오히려 정확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다만 제 세대의 기준으로 한 병을 오래 두고 천천히 음미할 만한 클래식인지는 별개의 문제지요.

정리하자면, 발렌티노 Donna Born In Roma는 분명 잘 만든 향수입니다. 자스민을 삼중 변주로 풀어내는 발상이나 블랙커런트로 오프닝에 어두운 당도를 부여하는 솜씨는 현대 디자이너 향수로서는 상당한 수준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그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서, 향을 가만히 들이쉬며 명상에 잠길 틈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니 존중은 하지만, 제 장에서 한 병을 끝까지 들일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이 향이 2019년 이후 꾸준히 살아남아 젊은 층의 오리엔탈 입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고 조용히 인정해 둡니다.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

추천 6

댓글 2

  • 통카빈조아2026-08-18 09:24:55.828Z

    ㄹㅇ ㅇㅈ 나도처음에 병맥주같은 병디자인에속아서 걍달달한 플로럴인줄알았는데 입어보니까 생각보다구조가 탄탄하더라 블랙커런트터지는그새콤달콤이 은근 중독성있고 통카는 아니지만바닐라베이스가 깔끔하게 받쳐줘서구르망 좋아하는입장에서도 먹을만했음 ㅋㅋ 근데여름에풀배는무리임디캔해서 환절기 저녁전용으로쓰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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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갑은텅장2026-08-19 14:29:40.729Z

    아... 이 향 저도 작년에 겟해서 한동안 데일리로막 뿌리고 다녔는데 ㅎㅎㅎ 처음 써봤을때 느낌이 신기했던게, 분명 플로럴 오리엔탈 계열인데 이상하게 무겁지가 않더라구요. 블랙커런트랑 핑크페퍼가확 올라오면서 첫인상이 좀 톡쏘는 느낌이랄까. 근데 이게 시간 지나면서바닐라랑 자스민이 섞여서 은근히 달달해지는데... 전 여기서 좀 갈렸어요. 아침에 뿌리고 출근했는데 점심쯤 되니까 달달한게 올라와서 회사에서 좀 눈치보이더라구요 ㅠㅠ 뭐랄까, 젊은 오리엔탈이라고 하면 딱 이해되는게, 예전 오리엔탈 계열들처럼확 깔리는 묵직함보다는 약간 가볍고 발랄하게 치장한느낌? 근데이 가벼움이 오래가진 않더라당... 결국 베이스는또전형적인 바닐라-머스크라서, 이게질리는 사람은 진짜 금방 질릴듯. 저도 처음 두달은 맨날손이 가다가, 어느순간부터 블랙오피움 생각나면서 서랍행...ㅋㅋㅋ 지금은 가끔 꺼내뿌리는데 그때마다 '아 왜 샀지' 하면서도 또 뿌리는이상한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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