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면 어김없이 시트러스와 아쿠아 계열 향수들을 정리하고 다시 꺼내게 됩니다. 컬렉션 진열장 구석에 몇 년째 자리만 지키고 있던 캐롤라이나 헤레라의 212 서프 포 힘을 오늘 오랜만에 손목에 올렸네요. 출시가 2014년이니 어느덧 10년이 된 향인데, 이 향을 두고 '지금 다시 꺼내도 유효한가'를 놓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단 최초 분사 직후의 인상은 예상대로 단순명료합니다. 자몽의 톡 쏘는 시트러스가 먼저 치고 올라오고, 곧바로 염분기가 느껴지는 바다 노트가 그 아래를 받치는 구조입니다. 흔히 마린 계열 하면 짐작하는 오이 같은 수분감보다는,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지 않은 맨살에 소금기가 살짝 마른 뒤의 냄새에 가깝습니다. 확실히 이 지점에서 합성스러움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고, 민감한 분이라면 여기서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네요. 저 역시 첫 시향 때는 '다소 거친 마린'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15분 정도 지나면서 이 향의 본심이 드러납니다. 파출리가 은근하게 깔리면서 마린의 인위적인 날카로움을 중화시키고, 아로마틱한 허브의 쌉싸름함이 자몽의 산뜻함과 만나 의외로 정돈된 느낌을 줍니다. 해변가에서 막 튀어나온 젊음이라기보다는, 모래사장이 보이는 카바나에서 조용히 칵테일을 기다리는 단계로 이행하는 느낌입니다. 이 중반부 전개는 제법 괜찮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실용적인 여름 데일리로는 충분한 완성도라고 봅니다.
다만 드라이다운까지 가면 파출리의 비중이 지나치게 올라오고 마린의 잔향과 결합하면서 약간 탁해지는 감이 있습니다. 시원하게 시작해 시원하게 끝나길 기대했다면, 마지막에 의외의 묵직함 때문에 당황할 수도 있겠네요. 여름밤 야외 테라스에서 마지막 한 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겠으나, 실내로 들어오면 살짝 답답하게 느껴질 여지가 있습니다. 지속력은 4~5시간 정도로 여름향 치고는 준수한 편이고, 확산력은 과하지 않아 사무실에서도 부담 없을 수준입니다.
결국 이 향은 '여름을 위한 향수'라는 명제에 충실한 선택지입니다. 아트적인 경지나 독창성을 논할 자리는 아니고,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는 가격대의 접근성과 무난하게 입기 좋은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컬렉션에 이미 마린 계열 명작들이 여러 병이라면 굳이 추가할 필요는 없겠지만, 처음으로 시트러스 아쿠아 계열을 들이는 분이라면 실패 확률이 낮은 선택입니다. 저는 기왕이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오는 6월 초쯤, 습도가 아직 낮고 바람이 부는 날에 쓰는 쪽을 추천하고 싶네요.
이미 단종되었거나 구하기 어려운 향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10년 전의 발매작인 만큼, 요즘 트렌드의 '니치급 투명감'이나 '레플리카류의 장소 재현 감각'을 기대하면 다소 평범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바다 향을 표방한 무난한 여름향이 필요하다면 시향해 볼 가치가 있다' 정도로 말씀드리고 싶네요.
혹시 이 향을 여름 시즌 내내 메인으로 쓰고 계신 분이 있다면, 어떤 환경에서 가장 만족감을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