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면 누구나 시트러스와 프레시 계열을 찾게 됩니다만, 이쪽 계열은 의외로 우아함을 유지하기가 까다롭습니다. 가볍게 끝나버리면 아쉽고, 무게를 잡자니 계절감이 무너지고요. 그래서 최근 며칠간 킬리안의 소피 마티스 아트 에디션 밤부 하모니를 다시 꺼내 테스트해봤습니다.
시트러스 노트들이 톱에서 예쁘게 반짝이긴 하는데, 예상보다 무척 정숙합니다. 베르가못과 비터 오렌지, 네롤리가 차례로 얼굴을 비추지만 30분도 안 되어 자취를 감춰버리고, 그 뒤로 화이트 티와 미모사가 만드는 맑고 부드러운 그린 플로럴이 전면에 섭니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허전함입니다. 킬리안 특유의 풍부한 베이스나 독특한 트위스트가 거의 존재하지 않고, 스파이스라고 표기된 노트는 거의 체감이 불가능할 정도로 얌전합니다. 우아한 실루엣이긴 하나, 이쯤 되면 '밤부'라는 이름에서 기대하는 싱그러운 대나무숲의 청량감이라기보다, 그저 얇은 모시 적삼 하나 걸친 듯한 미니멀리즘에 가깝습니다.
풀배틀을 채운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이 향수는 마치 문장 하나를 무척 우아하게 시작했는데 끝맺음을 너무 쉽게 흘려버린 필력처럼 느껴집니다. 수집가로서 보틀의 예술적 가치는 높이 사지만, 향 자체로는 MFK의 아쿠아 유니버셜리스 포르테 같은 경쟁작들이 주는 지적인 청량감을 따라잡기엔 한 끗 모자랍니다. 더위에 지친 피부에 얹기엔 참 예의 바른 향이지만, 깊은 인상을 남기길 바란다면 시향부터 넉넉히 해보시길 권합니다.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