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주 루텐의 바 드 솨이(Bas de Soie)를 오랜만에 다시 꺼내어 보았습니다. 2010년에 출시된 이 향수는 루텐의 플로럴 계열 중에서도 꽤나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요. 마치 프랑스 어느 오래된 저택의 응접실에 걸린 비단 커튼을 연상시키는 이름처럼, 이 향수의 본질은 아이리스, 그것도 대단히 푸르고 서늘한 아이리스의 정수에 닿아 있습니다.
처음 뿌리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것은 장미나 재스민 같은 전형적인 꽃내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히아신스 특유의 그린 노트, 그러니까 꽃망울을 감싼 푸른 줄기와 잎사귀를 비벼 으깬 듯한 날카로운 싱그러움이 먼저 코를 스치지요. 이 그린 노트가 만들어내는 서늘한 긴장감이 바로 바 드 솨이의 첫인상을 지배합니다. 요즘 시중에 흔한 달콤하고 투명한 꽃향수에 길들여진 분이라면 이 단계에서 적잖이 당황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향수의 진짜 묘미는 그다음부터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면, 그 푸르른 긴장감 사이로 아이리스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루텐 특유의 무미건조하다 싶을 정도로 정제된 아이리스, 당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파우더리함이 흙내음과 함께 올라옵니다. 이 흙내음 덕분에 향은 더욱 차분하고 지적인 분위기로 가라앉지요. 마치 잘 정돈된 정원의 축축한 흙 위에 떨어진 꽃잎을 보는 듯한, 그런 단아한 서정성이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 드 솨이가 결코 대중적인 사랑을 받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향수는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한, 혹은 나의 존재를 화사하게 알리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내면의 고요를 즐기기 위한,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향에 가깝지요. 확산력도 그리 강하지 않아, 피부 가까이에서 은은하게 맴돕니다. 제 경우에는 셔츠 소매나 손수건에 한 번 뿌리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사실 사계절 중에서 이 향이 가장 빛을 발하는 때는 단연 이른 봄이나 가을입니다. 여름에는 특유의 흙내음과 파우더리함이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 있고, 한겨울의 냉기 속에서는 그 섬세한 그린 노트가 다소 움츠러드는 감이 있습니다. 오히려 약간 쌀쌀한 바람 속에서 걸을 때, 목도리 사이로 스며나오는 그 서늘한 아이리스의 기운이 무척이나 운치 있습니다.
요즘 젊은 분들이 즐겨 찾는, 뿌리는 순간 달콤하고 강렬하게 터져 나오는 그런 향수들과는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때로는 이 향을 이해하기 위해 기다림이 필요하고,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끝에 다다랐을 때, 시간이 빚어내는 클래식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증명해 주는 향이 바로 이 바 드 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 병을 사서 몇 년에 걸쳐 천천히 음미하는 맛이 있는, 그런 종류의 향수입니다.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