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향수를 처음 접한 것은 꽤 오래전, 아마 2000년대 중반쯤이었을 겁니다. 당시에는 겔랑 하면 샬리마르 오리지널과 베티베르 정도만 알고 있던 시절이라, 레제르라는 접미사가 붙은 이 버전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어요. 세월이 흘러 다시 꺼내 본 감상을 공유해 봅니다.
샬리마르 레제르는 2003년에 출시되었습니다. 오리지널 샬리마르가 1925년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거의 8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현대적인 감각을 덧대려 한 시도였던 셈이죠. 실제로 당시 겔랑은 클래식 라인에 대한 리뉴얼 혹은 측면 지원격의 플랭커를 여럿 내놓던 때였는데, 이 제품도 그런 흐름 속에 있었습니다. 다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 리뉴얼의 방향성은 다소 절충적이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오프닝은 베르가못과 레몬으로 상당히 밝고 투명하게 열립니다. 오리지널 샬리마르 특유의 스모키하고 동물적인 레진 뉘앙스는 처음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고, 대신 시트러스가 마치 현대적인 오드트왈렛처럼 산뜻하게 터집니다. 이 지점에서 많은 분들이 '가벼워진 샬리마르'라는 평을 하시더군요. 저는 여기까지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습니다. 클래식 향수의 무게감을 덜어내고 데일리 웨어에 가깝게 접근한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작업이니까요.
문제는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발생합니다. 아이리스와 자스민이 올라오는데, 이 꽃들이 오리지널의 관능적인 오렌지플라워나 카네이션의 스파이시함을 대체하지는 못합니다. 파우더리함이 강조되면서 향이 갑자기 평탄해지고, 뭔가 화장품 냄새에 가까운 질감으로 변하더군요. 이 부분에서 원작이 가진 오리엔탈의 드라마틱한 전개를 기대한 분이라면, 레제르는 의외로 싱겁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도 첫 시향 때 "샬리마르라고 하기엔 너무 얌전하다"라는 감상을 적어둔 기억이 나네요.
드라이다운은 앰버와 바닐라가 받쳐줍니다만, 여기서도 오리지널 특유의 레더나 시벳, 인센스의 어두운 떨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따뜻하고 부드러운 파우더리 바닐라가 시트러스의 잔향 위에 얹히며 마무리되죠. 지속력은 평균적인 오드뚜왈렛 수준으로, 제 피부에서는 4시간 전후에서 체온에 녹아 사라졌습니다. 이 점이 실용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수집가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 향수를 두고 '실패작'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당시 겔랑이 했던 시장 조사와 고민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에 가깝습니다. 2000년대 초반은 니치 브랜드들이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전, 디자이너 브랜드의 클린 계열과 아쿠아틱이 시장을 장악하던 때였어요. 겔랑으로서도 무거운 클래식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있었을 테고, 그 타협점이 바로 이 레제르였을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지금도 회자될 만한 명작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말이죠.
혹시 이 제품을 구하실 분들은 유의하실 점이 있습니다. 이미 단종된 지 오래라 풀배틀 구하기가 쉽지 않고, 간혹 보이는 빈티지 병들은 보관 상태에 따라 탑노트가 완전히 날아간 경우도 제법 됩니다. 저는 몇 년 전에 간신히 상태 좋은 풀배를 구했는데, 그 과정에서 두 번 정도 변질된 제품을 받은 적도 있었어요. 디캔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런 구형 향수일수록 풀배 밀봉의 가치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샬리마르 레제르는 오리지널의 재해석으로서는 절반의 성공, 독립된 향수로 보면 준수한 오리엔탈 플로럴입니다. 다만 그 중간 지점이 과연 지금의 제 컬렉션에서 설 자리가 있는가 하면, 솔직히 말해 자주 손이 가는 병은 아닙니다. 오늘 꺼내서 다시 뿌려보니 그때보다는 이 부드러운 파우더리함이 낫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차라리 오리지널을 한 번만 더 뿌리자'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