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아침저녁 공기에 슬슬 쌀쌀한 기운이 섞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향들이 있습니다. 제 진열장에서도 여름 내내 앞줄에 서 있던 시트러스 계열을 뒤로 밀어내고 우디와 스파이시 노트가 중심인 병들을 하나둘 앞으로 당겨놓고 있네요. 그 과정에서 오랜만에 꺼내든 향이 있어 간단히 소회를 남겨봅니다.
랑콤 마니피크 오 드 뚜왈렛. 2009년 출시되어 지금은 단종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마니피크 라인이 꽤 공을 들인 컬렉션이었는데, EDP와 EDT 두 버전 모두 플로럴 우디 머스크를 표방하면서도 표현 방식에서 꽤 다른 결을 보여줬죠. EDT는 특히 웜 스파이시와 로즈, 우디 어코드가 EDP보다 훨씬 직선적으로 다가옵니다.
분사 직후 첫인상은 의외로 사프란에서 오는 따뜻한 스파이시함이 강하게 치고 나옵니다. 단순히 달콤한 장미를 예상하고 뿌리면 살짝 당황할 수도 있는 오프닝이에요. 하지만 이내 중후한 다마스크 로즈가 올라오면서 향의 성격이 분명해집니다. 제가 가진 다른 로즈 계열 니치 향들, 예를 들어 프레데릭 말의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처럼 장미를 건조하고 엄숙하게 다루는 쪽도 있지만, 마니피크 EDT의 로즈는 여기에 살짏 꿀을 바른 듯한 리치함이 가미되어 있어 접근성이 좋습니다.
드라이다운은 샌달우드와 머스크가 중심을 잡아주며 상당히 안정적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부분에서 단종된 지 오래된 구형 향수 특유의 노트 뭉개짐이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제가 들인 병은 보관 상태가 나쁘지 않았는지 우디와 머스크의 결이 제법 선명하게 살아 있더군요. 지속력은 EDT답게 길지 않습니다. 피부 발향 기준으로 네댓 시간 정도가 한계로 보입니다. 다만 이 정도면 가을날 외투 깃 안쪽에서 은은하게 체온에 섞여 올라오는 정도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종된 향을 구하는 일은 언제나 약간의 도박이 따릅니다. 변질 가능성, 과도한 프리미엄, 구매처 신뢰도 문제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향을 다시 찾아 꺼내는 건 어쩌면 수집의 본질과 닿아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성비로 재단할 수 없는, 특정 계절과 특정 기억에 묶인 향기의 레퍼런스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저에게는 유의미한 취미의 지점이니까요.
혹시 마니피크 라인을 예전에 사용하셨거나, 가을마다 꺼내는 단종 향수가 있으시다면 자유롭게 공유해주셔도 좋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이 향을 다시 입고 가을밤 산책을 다녀와야겠네요.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