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푹 꺾이고 더위가 시작될 무렵이면 시트러스 계열 향수들을 자연스레 찾게 됩니다. 저는 이맘때면 서랍 깊숙이 넣어둔 아쿠아 계열이나 라이트 아로마틱들을 꺼내서 상태를 점검하고 하나둘 입고해 보는데요. 지난주에 우연히 지인이 선물이라며 건넨 자라 Grapefruit Incense도 그런 맥락에서 시향하게 되었습니다. 2021년 출시작으로 자라에서 비교적 조명을 덜 받은 제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식 노트는 자몽, 로즈 드 메, 화이트 우드로 단출한 편이고 계열은 시트러스로 분류되더군요.
일단 첫 분무 인상은 꽤 산뜻했습니다. 자몽 특유의 쌉싸름하고 톡 쏘는 탑 노트가 제법 명확하게 올라오고, 뒤따라 로즈 드 메 특유의 가볍고 수분감 있는 장미 향이 은은하게 깔립니다. 일반적인 시트러스 계열이 레몬이나 베르가못으로 청량감을 밀어붙인다면, 이 제품은 자몽으로 살짝 비틀어서 상쾌함보다는 산뜻한 쌉싸름함을 강조한 느낌입니다. 처음 10분 정도는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어요. 미들에서 베이스로 넘어가는 전환이 지나치게 빠르고 매끄럽지 못합니다. 로즈 드 메의 플로럴이 자몽과 어우러지기보다는 서로 따로 노는 느낌이고, 이 지점에서 합성 특유의 뾰족한 알코올 감이 올라옵니다. 자몽 향이 사라지고 나면 남는 건 묽은 장미 향과 값싼 화이트 우드의 조합인데, 화이트 우드는 그냥 구조감 없는 밋밋한 베이스에 가깝습니다. 인센스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유향이나 스모키한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 명명 자체가 다소 의아하게 느껴졌습니다.
지속력은 시트러스 계열임을 감안해도 실망스러운 수준입니다. 피부에 분무 후 1시간이 지나면 이미 스킨 향기 수준으로 옅어지고, 옷섬유에 뿌려도 2시간을 넘기지 못하더군요. 실내에서 개인적으로 즐기기에도 프로젝션이 너무 약해 실용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물론 가격대를 생각하면 이런 지적들이 사치일 수 있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자라 향수들은 대부분 3~4만 원대 이하에서 형성되어 있고, 이 가격에 복잡한 구조나 고급 원료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욕심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가격과 완성도는 별개의 영역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저렴한 가격에도 훌륭한 밸런스를 보여주는 제품들은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Grapefruit Incense는 그런 사례에는 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초반 10분의 자몽이 매력적이긴 하나 향수는 시간을 두고 변주하는 전 과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여름용으로 부담 없이 휙 뿌릴 시트러스를 찾는 분들께는 나쁘지 않은 선택지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향의 완성도나 구조를 따지는 분이라면 실망하실 확률이 높습니다. 지인에게는 고맙게 받았지만, 제 컬렉션 진열장 한켠에 두기에는 솔직히 아쉬운 제품이었네요. 혹시 비슷한 가격대에서 괜찮은 자몽 베이스 향수를 경험하신 분 계시면 정보 공유 부탁드립니다 :)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