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이른 더위가 찾아온 요즘입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아직 선선한 기운이 남아 있지만, 낮 동안의 온도는 확실히 프레시 계열을 꺼내게 만드네요. 시트러스나 아쿠아틱 위주로 로테이션을 돌리면서도, 문득 프루티 노트의 가벼운 변주가 궁금해져 손이 간 것이 이 제품입니다.
자라 포 힘 러시(Zara For Him Rush)는 병 디자인에서부터 다소 직관적인 인상을 줍니다. 진한 푸른빛 유리 바틀이 무게감 없이 마감되어 있고, 스프레이어의 장력은 평범한 수준입니다. 가격대를 감안하면 실물 퀄리티에 큰 불만은 없습니다만, 수집용으로 진열하기엔 미니멀리즘이 과하게 적용된 느낌이 없지 않아요.
첫 분사 직후에는 제법 또렷한 라즈베리가 올라옵니다. 당도가 지나치게 높지 않은, 약간은 드라이한 질감의 붉은 베리 계열이라 여름용으로 기획된 의도가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이 라즈베리는 약 10여 분을 넘기지 못하고 빠르게 바이올렛과 앰버우드의 구조 속으로 흡수되어 버립니다. 탑노트가 지닌 생기 있는 산미가 채 지속되기도 전에 파우더리한 바이올렛이 화학적으로 얹히는 모양새라, 전체적인 첫인상은 조금 어색한 편입니다.
미드 노트로 접어들면 이 향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바이올렛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장품 뉘앙스를 동반한 파우더리함이 중심을 잡고, 그 아래로 스파이스라고 표기된 부분이 은근하게 떠받치는 구조인데요. 여기서 '스파이스'는 고추나 정향처럼 날카로운 형태가 아니라, 후추 계열의 무던하고 건조한 따스함에 가깝습니다. 바이올렛 특유의 보랏빛 이미지와 이 은근한 스파이스가 결합되면, 여름향이라기보다는 약간은 사계절용 오피스 향에 근접한 무드가 형성됩니다. 라즈베리가 사라진 시점부터는 애초에 기대했던 프루티함이 거의 자취를 감춘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베이스 노트에서는 앰버우드가 예상대로 모호한 우디-앰버 톤으로 자리잡습니다. 깊이 있는 베티버나 샌달우드 계열의 나무 결이 아니라, 합성 앰버-우디 베이스가 평평하게 깔리면서 잔향을 마무리하는 방식입니다. 지속력은 4시간 전후로, 패브릭에 분사할 경우 조금 더 길게 남아 있으나 실루지 면에서는 확연히 약한 편입니다. 확산력 또한 미드 타임에 잠시 존재감을 드러내는 정도에 그치고, 드라이다운 이후로는 피부에 가까이 밀착해야 인지되는 수준입니다.
고급 니치 하우스의 라즈베리 활용, 가령 프레데릭 말의 무슈(Monsieur.)나 바이레도의 믹스드 이모션스에서 보여주는 다층적인 베리 표현과는 확실히 결이 다릅니다. 물론 가격 차이가 수십 배에 달하는 제품들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만, 포 힘 러시의 라즈베리는 상당히 일차원적이고 오래 가지 않는다는 점은 솔직히 언급해야겠습니다. 굳이 긍정적인 측면을 찾자면, 자라 특유의 과도한 합성 알코올 톤이 이 제품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두드러진다는 정도입니다.
개인적인 결론으로는, 포 힘 러시는 애매한 위치에 서 있는 향수입니다. 여름을 표방하고 라즈베리를 내세웠으나, 실제 착향에서는 바이올렛 파우더리와 앰버우드의 점잖은 무게감이 더 오래 지배하기 때문에 청량감을 기대한 소비자에게는 다소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파우더리 우디 계열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탑노트의 라즈베리가 불필요한 장식처럼 느껴질 여지도 있고요. 결과적으로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완성도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가볍게 시험 삼아 써볼 만한 가격이니 구매 자체를 말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기대치를 명확히 정리하고 접근하는 편이 실망을 줄이는 방법일 것입니다. 프레시 프루티 여름향을 찾고 계신다면 차라리 같은 자라 라인에서도 시트러스 계열이 더 직관적인 만족감을 줄 확률이 높겠네요. 이 제품은 오히려 초가을쯤, 슬슬 더위가 꺾이는 환절기에 한 번 더 꺼내볼 생각입니다. 그때가 되어야 바이올렛과 앰버우드의 밸런스가 제법 자연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