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2004년, 장클로드 엘레나가 에르메스에 합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놓은 이 베티베 통카는 그가 평소에 견지하던 미니멀리즘과는 사뭇 다른 궤적을 보입니다. 우디 시프레를 표방하지만 실제로 만나는 건 베티베 특유의 흙내와 뿌리 향을 통카 빈의 유려한 스위트가 감싸안은 이중 구조이고, 여기에 아로마틱 노트가 은근히 개입하면서 구조를 느슨하게 만듭니다. 많은 분들이 이 향을 두고 "베티베가 사라진 향"이라 평하는 이유가 바로 그 지점으로, 에르메스는 베티베의 거친 질감을 날것으로 보여주기보다 통카의 마른 단맛 속에 침전시켜 버렸습니다. 저는 이 향을 시향할 때마다 엘레나가 과연 이걸 시프레로 분류할 의도였을까, 아니면 그가 즐기던 '투명한 수채화'를 살짝 비튼 예외작인가 하는 의문이 들곤 합니다. 결과물만 놓고 보면 우아하게 배신당한 느낌, 하지만 그 배신이 상당히 매력적인 사건임은 부인하기 어렵네요.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