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고 소식 듣자마자 바로 주문했던 본드 넘버 나인 그리니치 빌리지가 도착한 지 보름 정도 되었네요. 뉴욕에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을 딴 향수라는 점에서 브랜드 특유의 장소 기반 컨셉을 이번엔 어떤 방식으로 풀어냈을지 궁금했습니다. 2019년 출시작이지만 유럽 일부 매장에는 딜레이되어 국내에선 비교적 최근에야 원활하게 유통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뒤늦게나마 제대로 경험해보려고 풀배로 들였습니다.
첫 분사 순간, 꽤 강렬한 프루티 어코드가 한 번에 밀려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상큼한 오프닝을 좋아하는 편인데, 여기서 느껴지는 과일 노트는 흔히 생각하는 가벼운 시트러스 계열과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카시스가 주는 약간의 산미, 리치 특유의 투명한 당도, 복숭아의 말랑한 과육감이 한데 섞여서 상당히 진하게 터집니다. 여기에 탠저린이 살짝 알싸한 껍질 뉘앙스를 더해주는데, 이 첫인상은 마치 잘 익은 과일 바구니에 얼굴을 묻은 느낌에 가깝습니다. 굉장히 '즙이 많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구조예요. 같은 프루티 계열이어도 덜 익은 과일의 청량감보다는 완숙된 과육의 농밀함 쪽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10분 정도 지나면 자스민과 피오니가 천천히 앞으로 나오면서 오리엔탈 플로럴로서의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제가 이 구성에서 특히 눈여겨본 건 피오니의 사용입니다. 보통 프루티에서 플로럴로 전환될 때 무거운 백합이나 로즈 계열로 옮겨가면 첫인상과의 괴리가 생기기 쉬운데, 여기서는 피오니 특유의 청초하지만 화사한 꽃잎 질감이 초반부의 프루티한 잔향과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자스민이 인돌 위주가 아니라 깔끔하게 정돈된 찻잎 같은 청량함으로 뒤를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꽃 향이 올라와도 전체적인 인상이 텁텁해지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정말 영리하게 배합되었다고 느꼈어요. 오리엔탈로 분류될 만한 스파이시한 요소나 바닐라의 부담감은 이 타이밍까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드라이다운은 제 예상보다 훨씬 말랑하게 마무리됩니다. 머스크와 앰버의 부드러운 축 위에 첫머리의 카시스와 리치가 희미하게 남아서 마치 냉장고에서 꺼내둔 과일 샤베트가 천천히 스며든 면직물 같은 인상을 줍니다. 지속력은 제 기준으로 7시간 정도 보는데, 뿌린 직후에 비해 확산력은 의외로 금방 차분해집니다. 초반 1시간은 1미터까지도 느껴질 만큼 꽤 확산되는데 이후로는 피부 가까이에서 은은하게 체온에 섞입니다. 저처럼 하루 종일 향을 의식하고 싶어 하는 타입이라면 점심 전후로 한 번쯤 손목 안쪽에 덧발라주면 오후까지 첫인상의 농밀함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향수의 포지셔닝을 두고 '브랜드 특유의 오시크 멜로디 대비 덜 무겁다'거나 '델리나 라인의 프루티 플로럴과 유사하다'는 이야기가 시향 카드 앞에서 오가기도 하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오시크의 알데하이딕하고 동물성 터치가 있는 플로럴과는 애초에 지향점이 다르고, 델리나 특유의 바닐라 크리미함이 개입된 프루티함과도 엄연히 다른, 그야말로 무스크 기반 프루티 플로럴로서의 개체성을 확실히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특징 때문에 장소와 계절을 어느 정도 가린다는 점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여름 한낮에 뿌리기엔 좀 농익은 과일향이 땀과 섞일 위험이 있고, 한겨울에는 샤프란 같은 스파이스가 전혀 없어서 지나치게 싱겁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환절기나 약간 선선한 날씨에서 이 향수의 진가가 제일 잘 드러납니다.
가격은 알고 계시겠지만 본드 넘버 나인 니치 라인업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합니다. 디캔으로 먼저 만나보시길 권해드리는데, 이유는 단순히 가격 부담 때문만은 아닙니다. 초반 카시스의 산미가 사람에 따라 약간 화학적으로 느껴질 여지가 있어서 생각보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거든요. 제 경우엔 과일의 과숙된 뉘앙스 덕에 만족스러웠지만, 톱노트에서 더 맑고 투명한 시트러스를 기대하신다면 꽤 이질감을 느끼실 수도 있겠습니다. 실제로 한 번 프루티 플로럴 좋아하는 지인에게 디캔을 나눠줬는데 오프닝이 너무 무겁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향수를 굉장히 잘 만든 축에 넣습니다. 뉴욕 웨스트 빌리지의 낮 풍경을 표현했다고 하기엔 다소 이상화된 느낌이지만, 향수 자체의 조화와 완성도는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플로럴 미들로 넘어가는 전환부의 매끄러움은 동일 계열 다른 작품에서는 쉽게 찾기 어려운 수준이에요. 현재 진열장에서는 같은 계열이지만 좀 더 스파이시한 쪽을 보강한 걸 찾을 때 바카라 루즈 540 엑스트레와 번갈아 손이 갑니다. 그리니치 빌리지가 부담스럽지 않은 날에 착용할 수 있는 프루티 플로럴로서 자리잡는 중입니다.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