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병원에서 단골 손님이랑 향수 얘기하다가 또 바닐라 얘기 나와서 문득 생각난 건데, 베르사체 바닐 루즈 얘기가 진짜 안 나오더라고요? ㅎㅎ 다들 디올 바닐라 디오라마나 불가리 스플렌디다 패출리 텐션 이런 쪽만 얘기하지...
저는 작년 겨울에 우연히 백화점에서 테스트해보고 반해서 바로 데려왔어요. 솔직히 처음에 베르사체 향수는 브라이트 크리스탈이나 딜런 블루 이미지가 강해서, 이렇게 무게감 있는 바닐라도 만드나 싶었거든요. 근데 뿌려보고 느낌이 완전 달랐어요. 오리엔탈 바닐라 계열인데, 처음 분사했을 때 장미가 진짜 진하게 올라와요. 그것도 좀 어둡고 꾸덕한 레드로즈 느낌이에요. 싱그러운 로즈 계열 좋아하는 분들은 초반에 좀 당황하실 수도 있어요. 저는 오히려 그게 좋았어요. 바닐라가 달디단 디저트 바닐라가 아니라, 약간 스모키하게 깔리는 머스크 덕분에 묵직하니 고급스러워지거든요.
시간 지나면 바닐라가 점점 더 드러나는데, 이게 바카라 루즈 540 같은 알데하이드 계열 바닐라도 아니고, 라타파 야라처럼 코코넛 밀크 쉐이크 같은 키치함도 전혀 없어요. 그냥 절제된 단맛이라고 해야 되나. 머스크랑 장미 잔향이랑 섞여서 약간 뿌옇게 퍼지는 느낌이에요. 확실히 여름보다는 선선할 때가 제철이고, 20대 초반보다는 30대 들어선 분들이 더 잘 소화할 스타일이에요.
단점은 체류력이 생각보다 길지 않아요. 오리엔탈 계열치고 베이스가 묵직하게 오래 남는 타입은 아니라서, 4~5시간 정도 지나면 피부에 코를 박아야 겨우 느껴져요. 저는 그래서 겨울에 니트 안쪽에 한 번 더 분사하거나, 머리카락 끝에 살짝 묻혀서 보완해요. 그리고 확산력도 폭발적이지 않고, 딱 사람 지나갈 때 은은하게 남는 정도? 그래서 니치 향수 특유의 강한 인상보다는 데일리로 부담 없이 쓰기 좋아요.
개인적으로 이 향수 포지션이 좀 애매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가격대가 디자이너 치고 저렴하지도 않은데, 그렇다고 니치만큼 퀄리티가 빼어나냐 하면 살짝 2% 부족한 느낌이에요. 같은 오리엔탈 바닐라 계열에서는 톰 포드 토바코 바닐이나 세르주 루텡 운 보아 바닐 정도는 되어야 베이스가 단단하고 층이 두꺼운데, 이건 좀 심심하게 끝나버려요. 그래도 병 디자인은 진짜 만족해요 ㅎㅎ 베르사체 특유의 메두사 장식이 뚜껑에 박혀있는데, 이번엔 과하지 않고 블랙이랑 골드 조합으로 딱 떨어져서 화장대에 두면 고급스러워 보여요. 2019년 출시라 벌써 5년 넘었는데, 아직까지 한국에선 재고가 좀 남아있는지 할인 행사 걸리면 저렴하게 살 수 있어요.
혹시 바닐루즈 쓰시는 분들 계시면, 저랑 비슷하게 느끼셨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초반 로즈가 진하게 다가오는 게 호불호 갈릴 거 같은데, 전 그 부분이 시그니처라고 생각하거든요. 반대로 저처럼 화이트 플로럴 못 받는 분들은 이쪽이 더 편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고. 아, 참고로 바카라 루즈 계열 단내 바닐라 싫어하시는 분들은 이거 테스트 한 번 해보세요. 바닐라인데 단내가 과하지 않아서 의외로 취향 저격당할 확률 높아요 ㅎㅎ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