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해외 향수 전문몰에서 드리스 반 노튼의 소이 말라케 풀배를 직구했습니다. 시향 없이 노트 구성만 보고 결정한 건데, 베르가못과 블랙커런트의 프루티한 오프닝에 로즈를 거쳐 카카오와 밤으로 마무리되는 오리엔탈 구조가 대단히 우아하리라 짐작했지요. 실제로 초반 30분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블랙커런트 특유의 어둡고 달콤한 과실향이 베르가못의 산뜻함과 맞물리며 Quite 세련된 인상을 주더군요. 그러나 문제는 중반부부터였습니다. 노트에 명시된 '실크'라는 추상적 소재가 제 피부 위에서는 합성적인 크리미함으로 풀어지면서, 로즈와 뒤섞여 값비싼 화장품 냄새에 가깝게 변질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인공적인 분말감에 두통이 오는 체질이라, 이후 두 시간가량 상당히 괴로웠네요. 게다가 정작 기다렸던 카카오와 밤은 드라이다운에서조차 존재감이 미미해, 결국 실크라는 관념적 이름값에 묻혀 버린 구성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저처럼 묵직한 카카오와 스파이시한 밤의 교차를 기대한 분이라면, 이 향은 오히려 불쾌할 만큼 부드러운 프루티 플로럴에 머무를 공산이 큽니다. 이번 건은 몇 안 되는 풀배 구매 실패 사례로 남을 듯합니다 :)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