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이면 저는 으레 장식장 한쪽에 모셔둔 구형 시프레 계열 병들을 하나둘 꺼내 먼지를 터는 편입니다. 올해는 유독 여름이 길었고 그래서 더 묵직한 향이 반가웠는데, 가장 먼저 손이 간 것은 의외로 구찌 바이 구찌 EDP였습니다.
이 향수를 처음 접한 건 2007년 출시 직후였고, 당시 신촌 현대백화점 구찌 매장에서 테스터를 뿌렸다가 탑 노트의 구아바와 배가 올라오는 순간 '이게 시프레라고?' 하는 의문이 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시프레 플로럴이라기에 오크모스와 베르가못의 싸늘한 녹색 개방감을 예상하고 손목을 내밀었는데, 정작 코끝에 닿은 것은 농익은 열대 과일의 끈적할 정도로 달콤한 첫인상이었으니까요. 그때는 한 번 시향하고 바로 접었습니다. 제 취향이 아니라고 단정했죠.
하지만 향수를 오래 모으다 보면 시향지에서 걸러졌던 향이 몇 년 뒤 완전히 다른 얼굴로 다가오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 향도 그랬습니다. 작년 겨울, 지인으로부터 처분한다는 풀배를 거의 받다시피 넘겨받았는데, 반강제로 소장하게 된 병을 집에서 혼자 차분히 다시 뿌려보고 나서야 이 향의 진짜 구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확실히 초반은 여전히 낯섭니다. 구아바 특유의 열대적 단맛과 배의 묽은 수분감이 뒤섞여 마치 통조림 시럽을 연상시키는, 시프레라기보다 프루티 플로럴에 가까운 인상을 줍니다. 티아레 플라워가 이 지점에서 살짝 비누향처럼 올라오는데, 이 비누 느낌이 호불호를 크게 가르겠다 싶더군요. 저조차도 처음 이십 분 정도는 '내가 지금 무슨 향을 뿌린 거지' 하고 살짝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삼십 분쯤 지나면서 드라이다운이 시작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허니의 묵직한 단내가 올라오면서 앞서 요란하던 과일향을 짓누르고, 그 밑에서 파출리의 흙냄새와 보드라운 머스크가 차례로 얼굴을 내밉니다. 이 지점이 진짜 시프레의 정체를 드러내는 구간인데, 전형적인 시프레처럼 차갑고 딱딱한 오크모스 대신 꿀과 머스크로 중후함을 빚어내는 방식이 꽤 이례적이예요. 묵직한데 어둡지 않고, 달콤한데 경박하지 않은 묘한 중간 지점을 파고듭니다.
지속력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보통 시프레 계열이 그러하듯 이 향도 피부에 최소 여덟 시간 이상 남고, 특히 울 니트나 코트 소맷자락에 스며들면 다음 날 오후까지도 은은한 파출리 잔향이 남아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늦은 밤 퇴근 후 와인바에서 혼자 잔을 기울이다가 팔목에서 올라오는 잔향이 너무 완벽해서, 향수 뿌린 본인이 도리어 취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난점은 발향 초반 삼십 분을 견디지 못하는 분들이 꽤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제 지인 중 한 명은 이 향을 맡자마자 두통을 호소하며 창문을 열었을 정도니까요. 민감하신 분들이라면 시향지 테스트를 넘어 꼭 팔목에 직접 뿌려보고 두어 시간 경과를 지켜보시길 권합니다.
이 향이 단종됐는지, 아직 일부 매장에서 소량 유통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다만 중고 시장에서도 박스 있는 풀배는 보기 어려워졌고, 제가 가진 병도 사실은 지인에게서 건네받은 터라 소중히 아껴 쓰고 있습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더더욱 꺼내기 좋은 향입니다. 여름의 과일향이 겨울의 머스크와 파출리로 가라앉는 이 완만한 하강 곡선은, 날씨가 선선해질수록 더 진하게 체감됩니다. 초반의 당혹스러움조차 이 향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절차였다고, 이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