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영 세일할 때 6만 8천원 주고 샀어요. 사실 뮈글러 엔젤 라인은 워낙 호불호가 극단적이라 평소에는 손이 잘 안 가는데, 이건 'Summer Flash'에 'Innocent'까지 붙어있길래 혹시 좀 순해졌나 싶어서 덜컥 샀습니다. 결론은, 순하지 않습니다. 순한 맛 버전 절대 아니에요.
일단 첫 분사 느낌은 '프루티'가 아니라 '스위트 프루티'의 폭격이에요. 망고와 카시스가 확 올라오는데, 자연산 과일향이 아니라 시럽에 절인 통조림 과일 느낌. 거기에 바닐라가 받쳐주는 게 아니라 바닐라가 메인 멜로디를 아예 먹어버립니다. 프레시 계열도 분명 들어있다고 하는데, 제 코에는 그냥 달콤한 과일향을 휘발성 좋게 확산시키는 역할만 하는 것 같아요. 더운 여름날 한강 공원에서 처음 뿌렸다가 10분 만에 속이 살짝 메스꺼워져서 바로 화장실 가서 팔뚝 씻어냈습니다. 이거 오리엔탈 바닐라 계열이잖아요. 오리엔탈 특유의 알싸함이나 스파이시함을 기대했는데, 그런 건 없고 그냥 프루티 바닐라 폭탄.
팩트는, 이 향수 지속력이 미친 듯이 좋다는 겁니다.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에요. 손등에 테스트 한 번 뿌리고 비누로 두 번 씻었는데도 4시간 뒤에 코를 대보면 바닐라 잔향이 자글자글 남아 있어요. 저처럼 달고 강한 향에 두통 오는 사람은 진짜 조심해야 합니다. 요즘 같은 한여름에 실내 밀폐된 카페에서 이거 뿌리면 주변 사람들한테 미움 살 확률 80% 이상이에요.
제가 느끼기엔 이거 2006년작이라길래 솔직히 요즘 트렌드랑 거리가 좀 있어요. 요즘 니치 바닐라들처럼 보드라운 우디나 머스크로 마무리를 안 하고, 2000년대 초반 특유의 '합성감 살짝 느껴지는 강한 단맛'이 끝까지 갑니다. 예전에 샤넬 알뤼르 옴므 스포츠 초기형 같은 데서 느꼈던 인위적인 달달함이라고 할까요. 이걸 '복고풍'이라고 좋게 말할 순 있겠지만, 저한테는 그냥 올드했습니다. 차라리 라타파 같은 데서 나오는 바닐라 계열 듀프 중에 이거보다 훨씬 삼키기 편한 애들이 몇 개 있어요. 결이 다르지만, 가성비 무게감 따지면 이 향수 가격 7만원 주고 살 바엔 차라리 그쪽이 낫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물론 라타파도 라타파대로 호불호 갈리긴 합니다.
며칠 전에 시원한 저녁에 혼자 동네 산책할 때 한 번 더 써봤는데, 바람 부니까 그나마 괜찮았어요. 그래도 재구매 의사는 없습니다. 당근에 올릴까 하다가, 뮈글러는 짝퉁도 많고 해서 그냥 욕실 방향제 대용으로 쓰려고요. 이거 정품 맞는지 확인하는 게 더 귀찮더라구요. 초보자분들은 특히 시향 필수입니다. 무턱대고 샀다간 옷에 향이 배서 빨래 돌려도 냄새 안 빠져서 곤란해질 수 있어요.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