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시 소식 듣고 무척 기대했던 향입니다. 지난주 백화점 이솝 매장에 들러 시향하고 바로 다음 날까지 리트머스로 팔목에 남은 잔향까지 확인한 후 내린 결론이니 나름 신중하게 썼다고 생각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는 풀배 구매 보류했습니다.
- 첫 스프레이: 카다멈과 핑크페퍼가 동시에 확 올라오는데 이 조합이 묘하게 약국 냄새를 떠올리게 합니다. 약국이라고 하면 오해하실까 봐 덧붙이자면, 조제실에서 맡을 법한 허브 티와 소독용 알코올이 섞인 듯한 인상이에요. 시트러스가 있음에도 상큼함보단 건조하고 따끔한 느낌이 먼저 코를 찔렀습니다.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불쾌하진 않았지만 굉장히 까다로운 오프닝이란 인상이 강했고, 같이 시향하러 간 지인은 바로 얼굴 찌푸리더군요.
- 중반 전개: 10분 정도 지나자 카모마일과 제라늄이 올라오면서 특유의 허브 티 같은 정갈함이 살아납니다. 이때부터는 확실히 이솝다운 미니멀한 뉘앙스가 드러나는데, 문제는 매그놀리아 리프가 가진 푸르고 살짝 금속성에 가까운 초록 잎사귀 뉘앙스가 너무 차갑게 올라온다는 점이었어요. 플로럴 계열로 분류되어 있지만 장미나 재스민 같은 꽃 내음이 아니라 화원에서 맡는 잎사귀와 줄기 냄새에 가깝습니다. 여기에 제라늄 특유의 로즈 제라니올 페어가 아니라 좀 더 민트에 근접한 쪽이 부각되면서 ‘차가운 허브정원’ 이미지로 굳어지더군요.
- 지속력과 잔향: 팔목에 두 번 분사하고 외부 일정을 소화했는데, 4시간 정도 지나자 거의 스킨 향 수준으로 내려앉았습니다. 잔향은 우디와 웜 스파이시로 정리되는데, 이조차도 매우 얇아서 일부러 팔목을 갖다대지 않으면 인지가 어려울 정도였어요. 이 부분이 가장 아쉬웠습니다. 이솝은 본래 오드퍼퓸보다 가볍게 만드는 경향이 있지만, 20만 원대 중반 가격을 생각하면 기대치엔 못 미쳤습니다.
-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구조입니다. 저는 이솝의 마라케시 인텐스나 이더시스 같은 다소 무겁고 교회당 인센스 계열을 선호하는 편이라, 이렇게 정제된 푸른 허브 계열은 취향에서 살짝 빗겨갔습니다. 반면 바이레도의 플라워헤드나 딥디크의 롬브로 단 로 같은 화사한 플로럴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오히려 ‘가벼워서 좋다’고 느낄 수도 있겠죠.
매장에서 직원분이 ‘올해 봄 출시된 신상인데 국내 입고 물량이 많지 않았다’고 언급하시더군요. 그래도 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풀병은 어디까지나 제 컬렉션 진열장에 꽂혀서 최소 수년간 함께할 향이기에, 잔향이 아쉽거나 중반 전개에서 정서적 거리감이 느껴지면 과감히 보류하는 편입니다. 이솝이라는 하우스 자체에 대한 신뢰는 여전하지만, 오너는 제 인생 향 반열에는 들지 못했습니다. 이 향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반드시 리트머스 테스트 해보시고, 특히 시향지가 아닌 팔목에서 최소 세 시간 이상 체크하시길 권해 드립니다. :)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