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에 면세점 갔다가 펜할리곤스 매장에서 시간 때우다가 산 건데, 지금 생각하면 그날 컨디션이 좀 이상했나 봅니다. 직원이 피오니브 한 번 테스트해보라고 해서 손목에 뿌렸거든요. 첫 느낌이 나쁘지 않았어요. 바이올렛 리프 특유의 파릇한 풀내음이 올라오는데, 이게 흔한 그린 노트랑 결이 좀 달랐어요. 약간 물기가 있는 싱그러움이 아니라 보송보송하게 마른 느낌. 거기에 모란, 장미 이런 플로럴이 섞이면서 은은하게 올라오니까 매장 안에서는 '여성스럽고 우아하네' 이랬습니다. 100ml 사서 나왔죠.
그날 저녁 집에 왔는데 팔에서 계속 꽃향이 올라오더군요. 문제는 그게 좋은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비 오기 직전 눅눅한 날씨에 땀 살짝 섞이고 나니까, 자스민이랑 모란이 확 올라오면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어요. 평소에 플로럴 향수 많이 쓰는데 이건 뭔가 달라요. 장미도 가볍지 않고, 자스민 인돌도 은근히 묵직하게 깔려서 한여름에는 숨 막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남들은 '프레시 어코드'라고 해서 시원할 줄 알았지, 팩트는 그 프레시함이 첫 5분 정도만 유지된다는 겁니다.
잔향 단계에서 그 유명한 캐시메란 머스크가 올라오는데, 이게 정말 사람 나누는 노트 같아요. 전 캐시메란 특유의 따뜻하고 약간 합성적인 나무향이 몸에 닿으면 닭살 돋더라고요. 봄가을에 섬유에 뿌리면 그래도 견딜 만한데, 여름에 피부 직분하면 후반부로 갈수록 화장품 냄새랑 합쳐져서 본래 모란의 청아함을 다 눌러버립니다. 지속력은 6시간 이상 가는데, 이게 장점이 아니고 괴롭더군요. 씻어내고 싶어도 팔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음.
지금은 장농 깊숙이 처박아뒀다가, 가을에 기온 20도 이하로 떨어질 때나 한두 번 꺼냅니다. 그때는 또 느낌이 다르긴 해요. 모란의 화려함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캐시메란 머스크가 옷 안에서 따뜻하게 감기니까 어울려요. 결론은 이 향수, 출시된 게 2012년이라 요즘 잘 안 보이지만 중고로라도 구할 생각 있으면 여름용으로는 절대 사지 말라는 겁니다. 백화점 시향지는 에어컨 빵빵한 곳에서 잠깐 맡는 거니까, 집 밖에서 걸어 다닐 때 어떻게 변하는지 확인 안 하고 지르면 피 봅니다. 저처럼 패키지랑 첫 인상에 속지 마세요.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