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장마 진짜 길었던 해 있었잖아요. 그때 너무 습하고 답답해서 평소에 안 쓰던 계열의 여름 향수 하나 들여야겠다 싶어서 구매했던 놈입니다. 구매처는 신세계면세점 온라인. 에일리언 오리지널이랑 머그니피크까지 있어서 아쿠아 시크는 그냥 시원한 느낌이겠거니 하고 시향도 안 하고 질렀어요. 제 값 다 주고 산 거라 기대가 컸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제 서랍 어딘가에서 먼지 쌓고 있을 겁니다.
탑노트에서 진저랑 레몬 버베나 터지는 건 솔직히 좋아요. 근데 여기서 제가 기대한 건 이발소에서 뿌리는 그런 청량하고 톡 쏘는 시트러스가 아니라, 진짜 생강 씹을 때 느껴지는 알싸함과 쌉싸름함이 더 강합니다. 레몬 버베나가 청량을 잡아주긴 하는데 이게 상큼한 방향이 아니고 마치 허브차 마실 때 느껴지는 그 풀내음 섞인 레몬 껍질 향이에요. 처음에는 '오? 기존 에일리언보다 훨씬 얌전해서 괜찮네' 이랬어요.
문제는 프리지아가 올라오면서 시작됬습니다.
오리지널 에일리언도 그렇지만 이쪽은 머스크나 앰버 같은 게 아니라 플로럴로 밸런스를 잡으려고 한 모양인데, 이 프리지아가 습한 공기랑 만나면 진짜 사람 잡습니다. 제 기준에서 이건 꽃향기도 아니고 그냥 비릿한 물냄새에 가깝게 느껴졌어요. 거기다 진저의 알싸함까지 남아있으니까 코가 톡 쏘는 비린내... 라고 표현하면 좀 그렇지만 암튼 불쾌했어요. 상쾌하려고 뿌린 향수 때문에 두통이 와서 낮에 샤워까지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지속력은 무슨 4~5시간 정도 갑니다. 에일리언 라인답게 잔향은 오래 남는데 이게 문제예요. 없어질 듯 안 없어지면서 계속 프리지아의 그 특유의 인공적인 비누 베이스가 맴돌아요. 여기에 우디랑 앰버가 언제 나오냐 하면, 거의 베이스까지 가야 슬쩍 올라오는데 솔직히 거기까지 참을 이유가 없더라고요.
여름 향수, 특히 시트러스 계열 찾는 분들 많을 텐데 이건 진짜 여름에 함부로 못 뿌립니다. 장마철이나 습한 날에는 절대 금지고, 에어컨 빵빵한 실내에서 종일 있을 때나 그나마 테스트 해볼 만해요. 그래도 이걸 또 굳이 그런 날 골라 뿌고 싶진 않지만.
팩트는 이 향수가 평타 이상 가려면 시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겁니다. 흔히 말하는 '편안한 시트러스'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거부감 있는 스파이시와 플로럴의 조합이라 사람 많이 갈립니다. 당근에서 미개봉 가끔 보이던데 이거 선물로 줬다가 취향 아니라고 내놓는 물건일 확률이 80% 이상일 겁니다. 백화점 영수증 없는 중고 향수 살 거면 차라리 라타파 아쿠아 향수 하나 더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드는 물건이에요. 그게 더 대중적인 무난한 시트러스라도 줘요.
이거 하나 경험하고 나서 뮈글러는 무조건 신라인지 무슨 프로모션으로 시향 먼저 해보고 사는 걸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이 글에서 언급된 향수